음산한 음악이 흐른다. 스산한 마을 풍경이 화면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 위로 “어서오세요. 여기는 세령마을입니다.”라는 자막이 겹친다. 덜컹거리는 자동차 속 모습. 한 남자가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 위로 빠르게 자동차를 몬다. 위태롭게 달리던 자동차는 “끼익-”소리와 함께 급제동하고, 한 여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화면이 바뀌고 남자는 어두운 산길을 무엇엔가에 쫓기듯 뛰어간다. 그리고 다시 떠오르는 자막 “7년 전 그날 밤, 난 당신을 봤어.” 

감각적인 영상, 호기심을 자극하는 전개. 얼핏 영화 예고편을 떠올릴 법하지만, 이 영상은 상반기최고의 화제작으로 꼽히는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 ‘북 트레일러’이다. 북 트레일러란 영화 예고편처럼 책을 홍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상물이다. 1~3분 정도의 짧은 영상에 책 내용을 맛보기로 보여주는 방식으로 최근 출판시장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글보다는 영상에 익숙해진 세대를 출판시장으로 끌어오기 위한 출판계의 자구책이라고 볼 수 있겠다. 



↑ <7년의 밤> 북 트레일러 중의 한 장면


사실 북 트레일러 제작은 미국 등 서구에서는 이미 보편화된 현상이다. 대형 출판사가 북 트레일러를 만들 경우에는 영화 못지 않은 양질의 북 트레일러가 제작된다. 또 소설의 영화화를 희망하는 팬들에 의해 만들어진 아마추어 북 트레일러는 유튜브 등을 통해 전세계로 퍼지기도 한다. 이에 비하면 국내의 북 트레일러는 걸음마 단계에 불구하다. 지난해 7월 김영하 작가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가 출간될 당시, 작가의 팬인 한 미디어 아티스트가 자발적으로 북 트레일러를 제작하면서 출판사들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올해부터는 유명 작가, 장르 소설 등을 중심으로 북 트레일러 제작이 확산되는 분위기다. 이는 갈수록 디지털화되어 가는 세상의 변화에 출판시장이 발맞춰 뛰기 시작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오늘은 저자인터뷰는 물론 컴퓨터 그래픽, 전문 배우가 등장하는 북비디오 등 다양하게 진화해 나가는 북 트레일러의 현재를 살펴볼 예정이다. 영상으로 책이 한 걸음 더 가까워졌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작가와 독자, 배우가 소리 내어 읽는 ‘모르는 여인들’ 


↑ <모르는 여인들> 북 트레일러

나는 늘 어제보다는 오늘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이 낫다고. 개인적으로도 이십대보다는 삼십대가 좋았고 삼심대보다는 사십대가 된 지금이 나쁘지 않다. 이유는 단 하나다. 연애감정에서 멀어졌다는 것. 그토록 막연하고 불안하고 죽을 것 같은 고통스런 감정들이 모두 다 연애감정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으련만 마음이 연애 감정에서 멀어지자 자유로워졌다. 쓸쓸한 자유. 


이제는 명실상부한 ‘국민작가’로 불리는 신경숙 작가의 신간 <모르는 여인들>이 출간됐다. 올해 <엄마를 부탁해>가 전세계 31개국에 판권이 팔리면서 신경숙 작가의 신작에 대한 기대는 어느 때보다 높다. 하지만 작품만큼이나 눈길이 가는 것이 바로 북 트레일러다. <모르는 여인들>의 북 트레일러는 작가와 독자들이 연이어 책을 낭독하는 형식이다. 앞선 문단은 작가와 독자들이 낭독한 책의 일부분이다. 가장 눈의 띄는 점은 배우 유지태가 등장한다는 것. 유지태만의 특유의 저음으로 책의 일부를 읽어주는 모습은 보는 이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특히 격정적인 부분을 읽으면서 그가 보여주는 연기는 영화의 일부분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모르는 여인들>은 2003년부터 8년 동안 씌어진 7개의 단편소설이 묶인 책이다. 8년 만에 나온 단편집은 독자는 물론 작가에게도 특별한 의미다. 신경숙 작가는 “청탁을 받아서 썼다기보다 내가 쓰고 싶을 때마다 자발적으로 쓴 작품들”이라고 말했다. 가장 침울했을 때나 내적으로 혼란스러울 때 만들어진 작품이란 뜻이다. 그렇게 탄생한 7개의 소설은 ‘관계’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모르는 여인들>은 일면식도 없는 ‘모르는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서로 영향을 끼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 편의 뮤직비디오 같은 ‘그녀가 죽길, 바라다’


↑ <그녀가 죽길, 바라다> 북 트레일러


정수현 작가의 신작 <그녀가 죽길, 바라다>의 북 트레일러를 보고 있자면 한 편의 뮤직비디오를 보는 듯 하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화려한 색감과 빠른 화면 전환 등이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처럼 완성도 높은 북 트레일러가 탄생한 이유는 CF, 뮤직 비디오를 연출하는 이사강 감독이 제작했기 때문이다. 이사강 감독은 연출뿐만 아니라 편집, 영상 속 주인공까지 도맡아서 화제가 오르기도 했다. 업계에서 활약하는 감독이 직접 메가폰을 잡고 연출하게 된 배경은 정수현 작가와의 친분 때문이다. 평소 정수현 작가와 친분이 두터웠던 이사강 감독이 책을 읽은 뒤 흥미를 갖고 북 트레일러 제작을 먼저 제안했다고 한다. 정수현 작가는 “소설 속 주인공의 차갑지만 아름다운 이미지가 이사강 감독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에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더욱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만족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 동안 정수현 작가는 <압구정 다이어리>, <셀러브리티> 등 칙릿 소설로 젊은 여성 독자들의 공감을 끌어냈다. 하지만 신작 <그녀가 죽길, 바라다>는 로맨틱 미스터리물로, 다소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의 소설이다. 못생기고 뚱뚱해 뮤지컬 오디션에 거듭 낙방하는 여자가 우연한 사고로 인해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다른 여자에 몸에 빙의된다. 소설은 한 몸에 두 여자의 영혼이 혼재되면서 겪는 갈등을 풀어내고 있다. 정수현 작가는 여전히 젊은 층이 좋아할만한 소재로 삼았지만, 트렌디한 전재보다는 미스터리물에 가깝게 풀어내며 기존작과 차별을 두고 있다. 


다큐멘터리만큼 진지한 책 소개, ‘지식인의 서재’



↑ <지식인의 서재> 북 트레일러


앞선 북 트레일러가 하나같이 영화 예고편 같았다면 <지식인의 서재>의 것은 다큐멘터리 예고편 같다. 책에서 선정한 우리 사회 각 부분의 지식인들이 영상을 통해 서재와 책의 의미를 차분히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특한 점은 3분 18초짜리 프리뷰 영상과 책에 등장한 15명의 지식인들의 개별 인터뷰로 나뉘었다는 것이다. 프리뷰 영상은 15명의 지식인이 누구인지, 그들이 왜 책과 서재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 독자들에게 간단하게 이야기를 건넨다. 일종의 맛보기라고 할 수 있다. 프리뷰 영상이 끝나면 15명의 지식인 각각의 인터뷰를 통해 개별적인 사연을 들어볼 수 있다. 약 1~2분짜리 영상으로 길지는 않지만 간명하게 책과 서재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말, 어릴 적에 한 번쯤은 들었을 법한 이야기다.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이가 들어 돌이켜보면 충분히 공감할 만한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많은 책을 읽고 훌륭한 사람이 된 이들’은 어떤 책을 읽었을까. <지식인의 서재>는 바로 이러한 궁금증에서 시작된 책이다. 저자는 직접 우리사회의 지식인들의 서재로 찾아가 인터뷰를 하면서 순수하게 ‘책’에 대한 이야기를 엮어낸다. 사실, 그들이 책을 통해서 얻었고, 알았고, 느꼈던 것들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에 의미를 두고 평생을 살아왔고 꾸준히 책을 통해 세상을 읽어갔기에 손에 꼽히는 ‘지식인’으로 불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말연시, 마음 속에서 잠자고 있던 독서열에 불을 댕길 법한 책이다. 


작가의 육성으로 직접 듣는 ‘난설헌’



↑ <난설헌> 북 트레일러


소설 속 배경과 주인공을 연상시키는 인물, 그리고 저자의 인터뷰까지. <난설헌>의 북 트레일러는 전형적인 ‘한국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재생버튼과 함께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전통한옥의 모습이 화면에 가득 찬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한옥, 중간중간에 스치는 한 여인. 소설 <난설헌>을 그대로 영상에 옮겨놓은 듯 하다. <난설헌>을 영상으로 읽은 이후에는 최명희 작가의 인터뷰가 이어진다. 작가의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겠지만, 작가의 육성을 통해 듣는 생생한 작품소개는 북 트레일러만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난설헌>을 쓰면서 가장 인성적이었던 장면과 초희 허난설헌의 의미 등 작가의 설명을 듣고 있자면 고된 삶을 살고 요절했던 그녀의 이야기가 자못 궁금해진다. 그리고 영상 중간에 들어간 여러 장의 수묵화는 소설의 느낌을 시각적으로 잘 살려준다. 

소설 <난설헌> 지난 10월 ‘혼불문학상’을 받은 데 이어 KBS 인기 프로그램 <1박2일>에서 언급되며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책은 조선시대 천재 여류시인 허난설헌의 고난했던 인생을 돌아보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초희.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의 누나로서, 사대부가의 여인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천재적인 글솜씨를 드러내 주변을 놀라게 만들었다. 하지만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가문에 시집을 가서 불행한 결혼생활에 빠지면서 심신이 쇠약해진다. 그런 가운데서 자신이 쓴 시를 모아 <난설헌집>을 펴냈고, 27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소설 <난설헌>은 여성에게는 혹독하기만 했던 시기에 주옥 같은 작품을 남긴 그녀의 삶을 감동스레 그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