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실존의 분명한 조건 
  
란 존재에 대한 자기 인식은 타인과 접촉하면서 이루어지는 소통 속에서만 일어난다.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을 때 내 의식의 표층으로 떠오르는 나는결국 타인을 통해 경험하고 알게 된 나”(게랄트 휘터의 『우리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타인과 소통하지 않는 삶은 없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의 관계 속에서만 자기를 인식한다. 그러니까우리라는 무리 속의일 뿐 저 혼자 있는가 아니다. 독일의 괴팅겐대학의 신경생물학과 교수인 게랄트 휘터는타인 속에서 자기를 인식하는 현상은 유아기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게랄트 휘터 교수는 위의 책에서아이가 입에 올리는 첫마디는가 아니라 상대방, 즉 엄마나 아빠·할머니·할아버지 등으로 나타나는에 대한 호칭이다. 아이는 충분히 오랜 시간을 두고 이들 타인과 끈끈한 관계를 맺고 그들을 본보기로 삼으면서 자신과 그들을 구분하고, 그러면서 그들 속에서 자신을 비춰 보고 그들을 관찰하고 따라 한 뒤에야 자신을 엄마·아빠와 다른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로 발견해 간다고 말한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타인의 도움이 없다면 생존이 불가능한 존재다. 사람은 저 혼자 태어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저 혼자 살아갈 수도 없다. ‘는 항상 무수한를 필요로 하는데, 이는 실존의 분명한 조건이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 소통에 관한 의미 깊은 성찰을 한다. 그에 따르면 사람은 무수한 타자의 무리 속에서 오로지로서만 살 수 없다. 사람은 누구든지 어디서든지 무슨 이유에서든지 누군가와의만남을 통해 살아간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고, 이 만남은 소통의 시작점이다. 이때 만남은라는 단독자와의 만남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 전체와의 만남이다.
 
사람은 누군가와의 소통을 필요로 하는 존재다. 누구도라는 존재와의 만남을 배제한 인생은 없다. 소통은의 존재됨에라는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긍정을 하는 한에서 이루어진다. ‘(인격)’그것(사물)’의 소유 관계가 아니라, ‘(인격)’(인격)’의 호혜 평등 관계로 살아야 한다.
 
 

혼자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한편으로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보존 욕구를 갖는다. 이 욕구는와 다른 대상을 먹거나 필요한 물건으로 바꾸면서 이룬다고 한 것은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다. 그에 따르면 사람은 자신의 욕구와 충동에 따라 타자와 세계를 향유하는데, 이는 자신에게 몰두하면서 세계에 관여하는 삶의 방식이다.
 
이는 타자를 도구화하고 대상화하는 방식으로 이때 도구는 욕망에 종속된다. 나의 존재에만 전념하는 것은 뚜렷한 한계를 갖는다. 레비나스는 그의 책 『존재에서 존재자로』에서 자신의 존재에만 전념하는이 시간은 슬픔을 달래고 죽음을 극복하기에 충분치 않다. 어떤 슬픔도 사라지지 않으며 어떤 죽음도 부활 없이는 견디어내지 못한다고 말한다.
 
타자를 환대하고 소통해야만 하는 진짜 이유는 분명해진다. ‘의 행복은 개별적 욕망의 충족, 즉 노동과 향유의 반복에서가 아니라 내가 환대하는 타인과의 소통 속에서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의 행복은의 행복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하다. 행복한와 행복한의 소통 위에서만 우리는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
 
 

 
왜곡된 소통의 욕구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은 세계와 소통하지 못하는, 혹은 세계와의 소통에 실패한 16세 소년의 방황과 불행을 그린다. 주인공이 신경쇠약으로 캘리포니아의 한 요양소에서 정신과 의사에게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털어놓는 형식을 취한다.
 
그는 해마다 키가 6.5인치씩 자라지만 어른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어른들은 한결같이 속물들이고, 어른들이 꾸리는 사회는 타락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 순수한 영혼은 그 순수함 때문에 더러운 세계에 편입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뉴욕에서 서부로, 허위와 기만에 물든 사회에서 자유와 순수가 오롯하게 유지되는 신세계로 도망간다.
 
그는 끊임없이 모든 것들을 빈정거리고 냉소를 대하는데, 이는 거짓과 가식에 물들어 있는 기성세대가 만든 제도들과 질서에 대한 거부다. 자신이 타락한 기성세대의 일원으로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곧 세계와의 소통을 끊고 도망가는 것이다.
 
그는 위선과 자기기만, 속물성에 물든 제도교육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립고등학교를 뛰쳐나온다. 그 사립고등학교가 광고에 내세운 귀족들의 놀이인 폴로 경기 사진을 보며 그 가식과 자기기만을 비웃는다. 그 학교를 다니면서 폴로는커녕 말 꼬리도 본 적이 없다고! 세상은 온통 이런 식이다.
 
세계는 모든 것을 그럴 듯한 거짓과 가식으로 포장하고 있다. 그는 그것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역겨워하며 소통을 거부한 채 자신의 자아 속으로 숨는다.
 
그는 유일하게 마음을 털어놓고 소통하는 여동생에게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정말 순수했기 때문에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한 주인공은 어린애들이 호밀밭에서 뛰어놀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나온 것은 1951년인데, 당대 대학생들에게 이 소설은 경전과 같이 널리 읽힌 책이다. 샐린저는 이 소설이 나온 뒤 얼마 동안은 대중과 접촉했지만 그 뒤로는 일체의 사교생활을 끊고 시골집에 은둔한다.
 
1980년에 호밀밭의 파수꾼』이 갑자기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비틀즈의 멤버였던 가수 존 레논이 저격당했는데, 마크 데이빗 채프먼은 존 레논의 등에 다섯 발의 총알을 쏜 뒤에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있었다.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소년 홀든 콜필드의 이야기에 몰입해 있던 그 역시 세계와의 소통을 거부한 채 자신의 자아 속으로 망명한 은둔자가 아니었을까? 그가 존 레논을 총으로 쏜 것은 왜곡된 소통의 욕구가 표출된 것은 아니었을까?
 
행복하고 싶다면 소통하라!  
 
사람은 함께 살고, 사랑하고, 존재해야 하는 존재다. 혼자 굴을 파고 그 속에 숨어 고립해서 살 수는 없다. 잘 산다는 것은 타인과 함께 잘 산다는 것이다. 우리는 소통하면서 상호간에 공감과 이해를 넓혀야 하고 상호 호혜적인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
 
소통은 우리가 함께 나란히 살기 위해서, 혹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가치다. 당신은 정말 행복해지고 싶은가? 그렇다면 진짜로 소통하라! 소통은 생명의 요청이고 명령일 뿐만 아니라 인생 최고의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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