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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라는 사람이 죽었다. 사망 확인 후 장례까지 치렀다. 그런데 어느 날 거리에서 A를 목격한다.

착각이 아니야. A가 분명해. 확신 끝에 당신은 그 사람에게 다가간다.

너 A 맞지? 아닌데요. 거짓말하지 마. 증거 있어요? 내가 A라는 증거. 당신은 말문이 막힌다.

네가 바로 너라는 걸 설명할 수 없다.

 

흥분한 당신은 A의 몸을 막무가내로 뒤진다. 신분증, 휴대전화, 노트북 같은 것들이 쏟아진다.

신분증에는 Z라는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통화 목록과 인터넷 접속 기록을 확인하면서부터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이 아는 A는 어디에도 없다.

이 순간, Z(라고 주장하는 이 사람)의 소지품을 소각한다면, Z가 Z가 아니라고 잠시나마 우길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A가 바로 A라는 걸 증명하기는 A 본인에게도 난제다.

 

 

 

다소 허무맹랑하게 들렸겠지만 사실 사람들은 이와 유사한 난제 속을 살아간다.

아무데나 버린 손톱을 먹은 쥐가 사람 흉내를 냈다는 호랑이 곰방대 시절까지 되짚을 것도 없다.

현재 이곳에는 ‘나’를 잃어 가는 여자를 묘사한 영화 ‘화차’가 있고,

4조원대 다단계 사기범 조희팔 사망을 둘러싼 의혹이 있으며,

갖가지 사정으로 주민등록을 말소한 채 거리를 떠도는 사람들이 있다. 보통은 뉴스에 오르내릴 이슈다.

하지만 사회적 문제와의 연계에 앞서 이것이 ‘나’라는 사람 자체의 결함이라면 어떤가.

애초에 “잊히고, 사라지고, 자신을 잃어 가고 해체되는” 것이 곧 ‘나’의 정체성이며,

그렇게 타고난 탓에 이 모든 현상이 비롯되었다면.

 

《명예》를 가리켜 “잊히고, 사라지고, 자신을 잃어 가고, 해체되는 것에 관한 책”이라고 말한 사람은 소설을 쓴 장본인 다니엘 켈만이다.

아홉 편의 단편소설이 연작을 이루고 있는 《명예》는 이야기마다 각기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은 서로 간에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이를테면 <로잘리에가 죽으러 가다>의 ‘로잘리에’는 <위험 속에서>에서 소설을 쓰는 ‘레오 리히터’가 만든 주인공이고, ‘레오 리히터’를 대신하여 이국에 간 작가 ‘마리아 루빈스타인’은 <동양>에서 실종되며, 잘못 걸려온 전화에 제멋대로 답한 <목소리>의 ‘에블링’이 <탈출구>의 ‘랄프 탄너’의 인생을 바꿔 놓는 식이다.

 

혼란에 빠진 인물들은 내가 ‘나’라는 걸 주장하지만 “옛 존재는 이미 떠나서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113쪽)하고 “남은 건 리얼리티가 전부”(152쪽)일 뿐이다. 아홉 번째 단편소설인 <위험 속에서>에서 언급되는 가상의 책 제목 ‘나 자신이 되는 법’(196쪽)은 《명예》를 역설적으로 함축한 암호처럼 느껴진다.

해독은 이제 “모든 게 진짜 일어난 거 아니지? 그렇지?”(194쪽)라는 질문을 받은 독자들이 할 일. 문제적 뉴스는 정체성을 찬찬히 탐색하기도 전에 속속 터져 나온다.

 

‘나’라는 허상(虛像)부터 마주하는 것이 어쩌면 이 모든 현상을 대하는 첫 순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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